•  
  •  
  •  
  •  
  •  
  •  
  •  
  •  
  •  
  •  
나다 노스탈리나
Nada Nostalina| Нада Носталина
본명
나다 이오시포브나 노스탈리나
Nada Iosifovna Nostalina
사랜드어: Нада Носталин
이명
나다 그로즈다노바 (1956~1969)
나다 마르티넬 (1969~2011)
출생
1925년 3월 9일
사랜드 공화국 크라슬리스크
사망
2011년 10월 14일 (향년 86세)
루이나 벨포르
국적
부모
아버지 이오시프 노스탈린
어머니 밀리차 그로즈다노바
형제
오빠 다닐로 노스탈린 (1904~1947)
배우자
레옹 A. 마르티넬 (1969년 결혼, 1974년 이혼)
동반자
브라니미르 S. 코스티치 (1963~1966, 사별)
자녀
딸 밀리차 마르티넬 (1970~)
종교
정교회 (1962년 세례)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문학부 (졸업)
직업
번역가, 작가
대표 저서
《아버지의 방》(1969)
《두 개의 침묵》(1977)
《보로베츠로 가는 길》(1994)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 (1925~1934)2.2. 모스크바 (1934~1949)2.3. 크라슬리스크 (1949~1953)2.4. 아버지의 마지막 (1953)2.5. 개명과 세례 (1953~1963)2.6. 코스티치 (1963~1967)2.7. 망명 (1967)2.8. 《아버지의 방》과 결혼 (1967~1974)2.9. 등을 돌리다 (1973~1980)2.10. 스틸워터 개인철2.11. 조용한 시절 (1980~1993)2.12. 귀향 (1993·1997)2.13. 만년과 죽음 (1998~2011)
3. 《아버지의 방》4. 사비에트의 침묵5. 평가6. 저서7. 여담

1. 개요 [편집]

나는 아버지를 고발하러 온 것이 아니다. 아버지 없이 살아 보려고 왔다.

1967년 4월 27일, 벨포르 공항 기자회견에서

사비에트의 초대 서기장 이오시프 노스탈린의 딸이자 번역가, 작가. 아버지의 망명지 모스크바에서 자라 1949년 붉은 혁명이 끝난 뒤에야 처음 '조국'에 들어왔고, 1953년 3월 아버지의 마지막 이틀을 곁에서 지켜본 몇 안 되는 가족이었다.

1966년 세상을 떠난 유고슬라비아인 동반자의 유골을 고향에 묻는다는 명분으로 출국 허가를 받은 뒤, 1967년 3월 베오그라드의 루이나 대사관을 찾아가 망명했다. 냉전 한가운데에서 적국 건국자의 딸이 망명해 왔다는 사실은 루이나 정부에 더없이 좋은 선전 재료였고, 1969년 펴낸 회고록 《아버지의 방》은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며 노스탈린의 사인을 둘러싼 독살설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2차 랜드 전쟁과 검은 10년을 겪으며 그녀는 루이나 정부와도 등을 돌렸다. 사비에트의 대정리에 대한 침묵과 루이나의 띠에우리엔 대학살에 대한 침묵을 나란히 놓은 1977년 에세이집 《두 개의 침묵》 이후,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는 그녀를 스틸워터 계획의 감시 대상으로 등재했다. 자유를 찾아 망명한 독재자의 딸이 망명한 나라에서도 감시를 받았다는 사실은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의 조사로 드러났다.

사비에트는 그녀의 망명에 끝까지 공식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국적을 박탈하지도, 재판에 넘기지도 않았으며, 대신 공식 기록과 사진에서 그녀를 조용히 지웠다. 1990년대 재편기에 두 차례 사비에트를 방문했지만 끝내 돌아가 살지는 않았고, 2011년 벨포르에서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2. 생애 [편집]

2.1. 어린 시절 (1925~1934) [편집]

1925년 3월 9일 크라슬리스크에서 사랜드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노스탈린과 밀리차 그로즈다노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46세, 어머니는 41세였고, 오빠 다닐로와는 21살 차이가 났다. 오랜 유형과 망명 끝에 늦게 얻은 딸이었다. 이름 '나다'는 사랜드어로 '희망'이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

가족은 크라슬리스크 동부 공장 지대의 노동자 아파트에 살았다. 아버지는 당 일로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나다를 키운 것은 인터그라드 방직공장 여공 출신으로 당 여성부에서 일하던 어머니였다. 노동조합 조직가로 일하던 오빠 다닐로는 오빠라기보다 삼촌에 가까운 존재였다. 나다는 훗날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현관에서 외투를 벗지 않고 서류만 놓고 가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2.2. 모스크바 (1934~1949) [편집]

1934년 5월 페트코비치 쿠데타로 아버지가 소련으로 망명하자, 나다와 어머니도 한 달 뒤 당의 지하 연락망을 통해 국경을 빠져나가 모스크바로 갔다. 오빠 다닐로는 사랜드에 남아 지하 조직에서 일했다. 아홉 살의 나다는 외국인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살던 코민테른 숙소 호텔 룩스에서 자라며 러시아어 학교에 다녔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러시아어가 사랜드어보다 편한 말이 되었다.

1936년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한 살이던 나다는 이후 아버지와 단둘이 남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코민테른 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대숙청이 호텔 룩스를 덮쳤을 때, 나다는 밤마다 복도 건너편 방들의 문에 차례로 봉인이 붙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라진 이웃들 가운데에는 사랜드 공산당 간부의 가족도 여럿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방》에서 "우리 집 문에만 봉인이 붙지 않은 이유를 그때는 묻지 않았고, 나중에는 묻지 못했다"고 썼다.

1941년 가을 아버지는 인민군을 이끌기 위해 비밀리에 사랜드로 돌아갔고, 열여섯 살의 나다는 모스크바에 홀로 남았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다가오자 코민테른 기관과 함께 우파로 소개되었다가 1943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문학부에 들어갔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전공해 1948년 졸업했다. 1948년 봄에는 인민군 연락원이 전한 편지로 오빠 다닐로가 지난겨울 인터그라드 감옥에서 처형되었고, 아버지가 포로 교환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3. 크라슬리스크 (1949~1953) [편집]

1949년 가을 붉은 혁명이 끝나자 나다는 15년 만에 크라슬리스크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러시아어를 사랜드 억양으로 말했다면, 딸은 사랜드어를 러시아 억양으로 말했다. 그녀는 국영 외국문학출판사의 번역가로 일하며 시내의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고, 흐라스티 관저의 아버지와는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1950년 대정리가 시작되자 출판사 동료와 대학 친구의 부모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나다가 체포된 동료의 일을 묻자 아버지는 "명단은 내가 만들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녀는 40여 년 뒤 공개된 대정리 처형 명단의 여백에서 아버지의 필체로 남은 메모를 보게 된다.

1951년 초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나다는 관저를 자주 찾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방》에서 아버지가 왼손으로 썼다는 쪽지 가운데 일부는 병상의 아버지가 쓸 수 없는 내용이었다고 증언했지만, 어느 쪽지가 그런 것이었는지는 특정하지 못했다.

2.4. 아버지의 마지막 (1953) [편집]

1953년 3월 4일 오후, 나다는 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의 전화를 받고 흐라스티 관저로 불려 갔다. 아버지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그녀는 이틀 동안 침실을 떠나지 않았고, 3월 5일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정치국원들이 침실과 옆방을 오가는 동안 가족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나다뿐이었다.

이 이틀의 기억은 훗날 《아버지의 방》의 가장 유명한 장이 되었다. 그녀는 경호원들이 아버지가 쓰러진 것을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알았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보였다는 것, 1952년 말 새로 온 주치의가 산소 공급과 처치를 두고 몇 번이나 옆방의 지시를 기다렸다는 것, 옆방의 정치국원들이 다음 회의 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록했다. 부검 기록을 보여 달라는 요청은 거절되었다.

2.5. 개명과 세례 (1953~1963) [편집]

1956년 니키타 인터루쇼프의 비밀 보고가 당 세포마다 낭독되자, 나다는 그해 가을 성을 어머니의 성인 그로즈다노바로 바꾸었다. 그녀는 이를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주는 문을 닫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1957년 아버지의 시신이 붉은 혁명 기념 영묘에서 고향 보로베츠의 마을 묘지로 옮겨질 때, 가족으로 참석한 사람은 그녀 한 명뿐이었다.

1962년 나다는 크라슬리스크 외곽의 작은 성당에서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다. 대정리 때 곡물 창고로 쓰이다 1950년대 말 다시 문을 연 성당이었다. 교회를 창고로 만든 사람의 딸이 창고였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그녀가 망명한 뒤 루이나 언론이 가장 즐겨 인용한 일화가 되었다.

2.6. 코스티치 (1963~1967) [편집]

1963년 나다는 출판사 일로 크라슬리스크에 와 있던 유고슬라비아의 번역가 브라니미르 S. 코스티치(1910~1966)를 만났다. 사랜드 문학을 세르보크로아트어로 옮기던 그는 오랜 공산당원이었지만 비동맹 노선을 고집하는 사람이었고, 사랜드어와 세르보크로아트어가 가까운 덕에 두 사람은 처음부터 통역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1964년 혼인 신고를 냈으나 당국은 이유를 밝히지 않고 받아주지 않았다. 건국자의 딸이 외국인, 그것도 소련 진영 밖의 외국인과 결혼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폐 질환을 앓던 코스티치는 1966년 10월 크라슬리스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다는 그의 유골을 고향 크랄레보에 묻게 해 달라고 청원했고, 석 달 만인 1967년 1월 한 달 체류를 조건으로 출국 허가를 받았다. 허가를 내준 것은 1964년부터 서기장을 맡고 있던 브레자코프의 측근들이었는데, 그들은 42세의 조용한 번역가가 돌아오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2.7. 망명 (1967) [편집]

1967년 2월 나다는 사비에트 대사관 직원의 동행 아래 유고슬라비아에 들어가 크랄레보 근교의 이바르강에 코스티치의 유골을 뿌렸다. 체류 기한을 며칠 앞둔 3월 8일 저녁, 그녀는 베오그라드의 숙소에서 동행 직원이 자리를 비운 틈에 혼자 택시를 타고 루이나 대사관으로 갔다. 대사관 경비에게 그녀가 처음 한 말은 "나는 이오시프 노스탈린의 딸이고,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였다.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의 루이나 정부는 유고슬라비아와의 외교 마찰을 피하려 그녀를 곧바로 루이나로 데려가지 않고 스위스로 보냈다. 나다는 6주 동안 스위스의 수도원에 머문 뒤 1967년 4월 27일 벨포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기자회견장에는 수백 명의 기자가 몰렸고, 바깥에서는 사비에트 망명자 단체 회원들이 '찬탈자의 딸'이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1949년 인터그라드 포위 때 빠져나온 이들에게 그녀는 망명자가 아니라 자신들을 쫓아낸 사람의 딸이었다.

2.8. 《아버지의 방》과 결혼 (1967~1974) [편집]

루이나 정부는 그녀를 냉전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나다는 1967년부터 1968년까지 루이나 정부의 대(對)사비에트 러시아어 방송에 몇 차례 출연해 종교의 자유와 금지된 문학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사비에트 체제 전체를 규탄해 달라는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이 시기 그녀는 벨포르 교외의 셋집에서 회고록을 썼다.

1969년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로 동시에 나온 《아버지의 방》은 루이나와 해협 북부에서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후 3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같은 해 그녀는 건축가 레옹 A. 마르티넬(1914~1991)과 결혼했다. 마르티넬은 1960년대 그랑프레 주택단지의 패널 아파트 재건에 참여한 공공주택 설계자로, 아내를 잃고 혼자 지내던 사람이었다. 1970년 45세의 나이로 딸 밀리차를 낳았는데, 이름은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서 땄다. 1972년 루이나 국적을 취득했다.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회고록의 인세와 그녀의 이름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고, 두 사람은 1974년 이혼했다. 나다는 이혼 뒤에도 딸과 함께 마르티넬이라는 성을 그대로 썼다.

2.9. 등을 돌리다 (1973~1980) [편집]

1973년 2차 랜드 전쟁이 일어나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전쟁에 들어가자, 데이븐포트 정부는 그녀에게 사비에트 병사와 인민을 향한 전시 방송을 요청했다. 나다는 1974년 초 이를 공개적으로 거절하며 "나는 어느 나라의 전쟁 선전에도 목소리를 빌려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부와의 관계는 이때 끊어졌고, 친정부 언론은 그녀를 '배은망덕한 망명자'라 불렀다.

1975년 10월 띠에우리엔 대학살 소식이 전해지자 그녀는 루이나의 침묵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비판했다. 1976년부터 러시아어 주간지 《베스트니크》에 칼럼을 연재했고, 1977년 이를 묶어 에세이집 《두 개의 침묵》을 펴냈다. 책은 사비에트가 대정리와 1951년 카스탄 기근에 대해 지켜 온 침묵과, 루이나가 띠에우리엔의 색출 작전과 아르덴역 폭발의 수사에 대해 지켜 온 침묵을 나란히 놓고 "두 나라는 서로를 가장 미워하면서도 침묵하는 방법만은 똑같다"고 썼다.

2.10. 스틸워터 개인철 [편집]

상세 내용은 스틸워터 계획 문서 참고.


《베스트니크》 연재가 시작된 1976년,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는 나다를 스틸워터 계획의 별표 제1종 관찰 대상으로 등재했다. 그녀의 전화와 우편은 감청되었고, 유고슬라비아의 코스티치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는 모두 사본으로 남았다. 개인철에는 딸 밀리차가 다니던 유치원의 이름, 그녀가 주일마다 찾던 벨포르 정교회 성당의 예배 시간, 서점에서 산 책의 제목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1978년 군정이 들어선 뒤에는 칼럼 연재가 중단되었다.

1980년 10.24 시민혁명으로 스틸워터가 정지된 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소각을 면한 개인철 77권을 확보했는데 그 가운데 한 권이 그녀의 것이었다. 나다는 1982년 열람을 청구해 자신의 개인철을 읽었고,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나라가 나를 서류로 만들었다. 한 나라는 지우려고, 한 나라는 지켜보려고.

1982년 5월, 개인철 열람 뒤

2.11. 조용한 시절 (1980~1993) [편집]

1980년대 나다는 공개적인 정치 발언을 줄이고 번역에 몰두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대정리 때 처형되거나 노동교화소에 보내진 카스탄족 출신 시인들이 사랜드어로 남긴 시를 프랑스어로 옮긴 시선집 《산지 선언 이후》(1986)였다. 아버지가 1942년 산지 선언으로 약속하고 1950년 대정리로 깨뜨린 사람들의 시를 딸이 번역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녀가 아버지의 일에 대해 내놓은 가장 분명한 답으로 읽혔다.

2.12. 귀향 (1993·1997) [편집]

1990년대 재편기에 사비에트가 문을 열자 나다는 1993년 루이나 여권으로 관광 비자를 받아 26년 만에 사비에트에 들어갔다. 사비에트는 그녀의 국적을 박탈한 적이 없었으므로, 법적으로는 자국민에게 비자를 내준 셈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아무도 그녀를 맞지 않았다.

그녀는 보로베츠의 아버지 묘를 찾았고, 인터그라드 감옥 터에서 오빠 다닐로의 매장지를 수소문했지만 기록을 찾지 못했다. 크라슬리스크에서는 아버지의 진료 기록과 부검 기록 열람을 요청했는데, 같은 해 일부 공개된 부검 기록에는 혈액 검사 부분이 통째로 빠져 있었다. 이 방문기는 1994년 《보로베츠로 가는 길》로 출간되었다.

1997년 그녀는 두 번째로 사비에트를 찾아 카스탄 자치지역에서 열린 1951년 기근 희생자 추모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72세의 노스탈린의 딸이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은 사진은 해협 전역의 신문에 실렸다. 사비에트 국영 언론은 이 장면을 보도하지 않았다.

2.13. 만년과 죽음 (1998~2011) [편집]

1998년 미하일 인터루쇼프가 집권해 아버지를 복권하기 시작하자, 나다는 벨포르에서 이를 비판하는 인터뷰를 몇 차례 했다. 2009년 크라슬리스크 혁명 광장에 아버지의 동상이 다시 세워졌을 때 그녀가 낸 짧은 성명은 지금도 자주 인용된다.
아버지의 동상은 그가 깨뜨린 약속들 위에 서 있다. 땅을 기다린 농민들, 산지의 시인들, 롱 강 건너의 형제들. 그 약속들의 이름을 동상 아래에 새길 수 없다면, 동상은 다시 세워질 자격이 없다.

2009년 10월, 벨포르에서 낸 성명

2011년 10월 14일 나다는 벨포르의 요양원에서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였고, 딸 밀리차가 임종을 지켰다. 장례는 벨포르의 정교회 성당에서 치러졌고 유해는 벨포르에 묻혔다. 사비에트 국영 언론은 그녀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았으며, 외신 기자의 질문을 받은 사비에트 정부 대변인은 "사적인 일"이라고만 답했다.

3. 《아버지의 방》 [편집]

《아버지의 방》(1969)은 나다가 세상을 떠난 동반자 코스티치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형식으로 쓴 회고록이다. 보로베츠의 할머니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어린 시절, 크라슬리스크 노동자 아파트의 어린 시절, 호텔 룩스의 봉인된 문들, 어머니의 죽음, 오빠의 처형 소식, 1949년 이후 크라슬리스크의 대정리, 1951년의 병상과 1953년 3월의 이틀이 차례로 이어진다.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1953년 3월 4일과 5일을 다룬 열여덟 번째 편지 〈3월의 방〉이다. 이 장은 노스탈린의 사인을 둘러싼 독살설의 주요 근거가 되었지만, 정작 나다는 아버지가 독살되었다고 쓰지 않았다. 그녀는 1990년대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독살되었다고 쓰지 않았다. 다만 그 방에서 아무도 아버지를 살리려고 서두르지 않았다고 썼다.

사비에트에서 이 책은 공식적으로 금지된 적이 없다. 금지하려면 책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책은 국경에서 압수되었고, 몰래 들어온 사본은 타자기로 베껴 돌려 읽혔다.

연구자들은 이 책을 노스탈린의 가정생활과 말년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1차 자료로 평가한다. 다만 나다는 아버지의 정치에 직접 관여한 적이 없었으므로, 책이 전하는 것은 권력의 안쪽이 아니라 권력 옆방의 풍경이라는 한계도 함께 지적된다.

4. 사비에트의 침묵 [편집]

사비에트는 나다의 망명에 끝까지 공식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국적을 박탈하지도, 반역죄로 재판에 넘기지도 않았고, 망명 사실을 보도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공식 기록에서 조용히 지워졌다. 1950년 노동절 열병식에서 아버지 옆에 선 그녀의 사진은 1967년 이후 출판물에서 수정되어 그녀가 서 있던 자리가 빈 연단으로 바뀌었고, 1970년 개정된 당사(黨史)는 노스탈린에게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국적을 박탈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박탈하려면 건국자의 딸이 연방을 버렸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 결과 나다는 2011년 죽을 때까지 서류상 사비에트 국민으로 남아, 사비에트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국민이 되었다. 아버지가 탈노스탈린화 이후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건국자'가 되었다면, 딸은 처음부터 이름이 없는 사람이 된 셈이다.

5. 평가 [편집]

루이나에서 나다에 대한 평가는 시기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1960년대 후반에는 자유를 찾아온 독재자의 딸로 환영받았고, 1970년대에는 정부의 전쟁 선전을 거부한 '배은망덕한 망명자'로 비난받았다. 1981년 스틸워터 개인철이 공개된 뒤로는 두 체제의 침묵을 모두 고발한 증인으로 재평가되었으며, 오늘날 루이나에서는 냉전기 망명 지식인 가운데 가장 독립적인 목소리를 낸 인물로 꼽힌다.

사비에트에서 그녀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1998년 이후 노스탈린이 복권되면서, 일부 민족주의 언론은 그녀를 아버지와 조국을 판 배신자로 공격하기도 했다. 반면 카스탄족과 대정리 피해자 단체들 사이에서는 《산지 선언 이후》의 번역과 1997년 추모비 앞의 모습으로 기억되며, 2011년 그녀가 죽었을 때 카스탄 자치지역의 몇몇 마을에서는 비공식 추도식이 열렸다.

해협 남부의 망명자 사회는 끝까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9년 인터그라드를 떠난 이들의 단체는 2011년 그녀의 장례에도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6. 저서 [편집]

  • 《아버지의 방》(1969)
  • 《두 개의 침묵》(1977)
  • 《산지 선언 이후》(1986, 번역 시선집)
  • 《보로베츠로 가는 길》(1994)

7. 여담 [편집]

  • 아버지가 러시아어를 사랜드어보다 불편해했던 것과 반대로, 그녀는 평생 사랜드어를 러시아어보다 불편해했다. 《아버지의 방》도 러시아어로 썼다.
  • 이름 '나다(희망)'를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방》 첫 번째 편지의 제목 〈희망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 딸 밀리차 마르티넬은 2013년 어머니의 원고와 편지, 스틸워터 개인철 사본을 벨포르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 루이나에서 그녀는 끝까지 '노스탈리나'라는 성을 쓰지 않았지만, 루이나 언론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노스탈린의 딸'로 불렀다.
[1] 사비에트는 그녀의 국적을 공식적으로 박탈한 적이 없다.